2006/01/22 04:56
그림자의 노래



원하는 것은, 갖는다.
삶은 짧고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있는데도 이 짧은 삶의 막이 어느 순간에 내려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은 갖는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부모님의 묘소에부터 들렀다.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노란 장미를 한 다발 놓아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일본 정종을 무덤에 부었다. 차를 몰고 돌아가야 했기에 마시지는 않았다. 나는 늘상 내 몫의 잔도 들고 왔었다. 때를 놓쳐 함께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차를 몰 수 있게 되고부터 마시는 일이 적어졌다. 한두잔 정도야 앉아서 바람쐬면 깨겠지만 나는 마시지 않았다.

묘소에서부터 따라온 햇빛은 뜨거웠다. 과사무실에서 만난 나영의 옷차림은 그 뜨거운 햇빛을 반영이라도 하듯 차갑게 흘러내리는 원피스와 흰 볼레로였다. 나를 보고 나영은 활짝 웃었다.

“선배! 왔다는 얘길 들었어요!”

입술이 반짝였다.

“왜 전화도 안해요?! 선배 온다는 소릴 내가 꼭 교수님한테 들어야겠어요?”

그리고 녀석은 약간 뺨을 붉히면서 그래도 당당하게 말했다.

“보고싶었단 말이에요.”

나는 나영의 머리에 툭 손을 얹었다. 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청결한 내음이 어린 머리카락의 감촉이 떠올라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보고 있던 동기녀석이 웃었다.

“이 녀석, 너 온다니까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이제 너 왔으니 얼마나 염장지르고 다닐지 상상하기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동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학교로 들어와 나는 내내 학교를 헤집고 다녔다. 학적과에서부터 학과장님, 담당교수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선배들을 찾아봤으며 과사무실에 찾아와 동기녀석들과 후배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애들은?”

그리고 망설이다가 무심히 말을 덧붙였다. 과사무실에는 에어컨디셔너가 있는데도- 얼굴이 덥다.

“지윤이는? 안 보이던데? 오피스텔에 살아?”

나영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선배, 자기 살던 데에도 들러보지 않았어요?”

들를 시간이 없었다. 아니…… 학교에 오는 것이 더 급했다.

“지윤선배는 이제 거기서 안 살아요. 현진선배네 오피스텔에서 사는걸. 현진선배가 영국갔으니까 지금은 거기서 혼자 살 거예요.”

지금, 혼자 산다.
현진선배- 누군지 기억한다. 지윤이가 마음을 트고 지냈던 깐깐하고 냉정하게 생긴 선배였다. 쉽게 곁을 줄 것 같지 않게 생긴 그 선배는 희한하게도 지윤이와는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그 손목을 잡아 끌어내고 싶었다. 두 사람이 빚어내는 조화의 공간에서 끌어내고 싶었다.
지금은 혼자 산다고.
그 선배와 함께 살았었다고.

나는 몸을 돌렸다. 인사를 읊으면서 돌아서는 내게 나영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선배, 오피스텔에서 혼자 저녁먹을 거죠? 같이 먹어요. 학교 근처에 맛있는 데 생겼는걸. 내가 알아뒀으니까, 이따 같이 먹어요.”

“도시락 사오면 돼.”

“선배!”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하는 내게 나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돌아본 나영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나, 선배한테 할 얘기 있어요. 나 아직…….”

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참는 듯한 얼굴은 나영에게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자주 하는 누군가를 안다…….

“선배한테 할 얘기 있으니까.”

1년 전의 할 얘기를 물리쳤었지. 그랬던가.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좋아. 그럼 아홉시에 오피스텔로 와.”

나영이 재빨리 웃으면서 눈에 떠올랐던 눈물을 감췄다.

“응, 이따 갈게요.”

선배, 선배, 난 선배가 좋아요. 그러니까 선배 앞에선 웃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한텐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속상해하고 우는 모습을 기억하게 하기 싫잖아요, 선배가 날 생각하면 늘상 웃으면서 밝은 아이라고, 생각만 해도 기분좋아진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눈물을 감추는 이를 안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참는 얼굴을 안다. 다른 이에게는 잘도 웃으면서 내 앞에서는 유독 잘 웃지 않는 얼굴을, 내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웃음도 눈물도 모두 감추는 얼굴을…… 알고 있다.

오피스텔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1년이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이미 1년 분의 먼지가 끈끈하게 엉겨 버려 손가락으로 털어도 털리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걷었다. 압축팩에 시트와 이불을 집어넣고 식기와 목욕용품, 쓰지 않았던 향수, 1년 전의 커피 같은 것들을, 자잘한 살림도구를 모두 대형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한 장으로는 모자랐다. 그것들을 집앞에 내놓는 걸 보고 이웃집 아주머니가 기겁했다.

“아이구, 학생, 이사가?”
“아니오.”
“그게 다 뭐야?”
“버리려구요.”

아주머니는 잠시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오피스텔이 학생 거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부자라도 그렇게 물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학생.”
“예.”

그래도 여전히 버리려는 내 심산을 눈치챘는지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지윤이가 썼던 컵이며 식기들, 이불과 가재도구들. 저 이불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섞었다. 그러고나면 다음날 지윤이는 꼭 이불을 빨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혼자 이불에 식기에 온갖 것을 사들이는 것을 점원조차도 미소 뒤에 의혹을 품고 쳐다보았다. 1년 분의 먼지를 없어던 것처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새 나는 1년의 공백, 1년의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윤과 함께 나누었던 취향을 모두 바꾸었으므로.

새 물건으로 가득 채웠어도 방은 여전히 사람 기척이 낯설었다.

어째서 때로 흩어지지 않는 감정이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리라고, 나는 착각했었다. 어째서 아무리 시간에 묻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어째서 가져도 가져도 목마른 것일까?

애초에, 나는 갖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일어섰다. 내 앞에서 웃음도 울음도 모두 참던 얼굴을 어떻게 가졌다고 착각했었을까.

학교에라도 다시 가봐야겠다.

나는 현진선배의 오피스텔이 어딘지 모른다. 학교에서 찾아보고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고 오피스텔을 나섰을 때, 지윤이의 모습이 홀연 나타났다. 지윤이가 멀리서부터 서서히 커져올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게 걸어오는 지윤이의 모습을 볼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내 길 앞에 홀연히 가로막고 나타나 나를 쳐다보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말을 꺼내는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랬다.

“건강해 보이네.”



☆ by 크레파스 | 2005-05-14 00:42 | 그림자의 노래 | 관련글(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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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먼여행의 정류장, 역장의 노트 | 2006/03/08 16:00 | DEL
갑작스럽게 문소리가 났다. 벌떡 놀라 일어났다. 이 집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더라. 내가 그에게 열쇠를 준 적이 있었나? 아니, 내가 이 곳으로 이사 온 건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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