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1/30 15:22
| 먼여행님의 그림자의 노래 열번째 이야기 인천 공항은 붐볐다. 여행가방을 끌고 가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면세점을 서성이고 있었다. 급하게 찾아서 표가 없을까 걱정했지만 여행사에 전화한지 30분만에 항공권을 확보했다는 연락이 왔다. 딱 한 통의 전화였다. 안녕, 진희 씨.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아? 응? 어떻게 알았냐고? 적어줬잖아? 아. 속담. 치호 씨가 걱정하지 말라면서 가르쳐줬어. 써먹으려고 기억해뒀지. 소명을 찾아 소명의 가게로 종종 드나들다가 얼굴을 익힌 그녀는 싹싹하게 명랑한 여자였다. 정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의 일에 팔걷어붙이고 나서며 참견도 서슴지 않는, 일본인 답지 않은 여자였는데, 그녀는 내가 떠날 때 눈시울을 붉히며 아쉬워했고 나는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다. 전화가 정말 올지는 몰랐다. 나는 당황한 채 받았다. 별 일은 없어. 그냥 보고싶어서 한 거야. 그리고 나보단, 치호 씨가 더 보고싶어 해. 한국이 그리운 게 아니라 한국의 연인이 그리운 거라면서? 연인이 있는 땅이 아무리 좋아도 가끔 연락은 해 줘. 치호 씨, 많이 쓸쓸해 해. 내색은 않아도 많이 보고 싶어 해. 그리고 나는 바로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소명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간다는 전화에 그녀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녀는 언제든 오라면서 웃었다. 면세구역은 몹시 붐볐다. 나는 돌아다니다가 매대에서 짙은 색의 청바지를 집어들었다. 뒷주머니가 다소 낮게 달린, 하지만 선이 무난하게 흐르는 바지였다. 청바지의 질기고 튼튼한 천의 감촉, 두꺼운 솔기의 감촉. 이 두꺼운 천이 얇아져 부드러워질 정도로 낡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지윤이가. 지윤이의 바싹 마른 허리를 안는 느낌이 갑작스럽게 내 안에서 부풀어올랐다. 처음 보았을 때도 말랐었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때, 전형기간의 마지막 날, 접수처를 임시로 만들어둔 강당 안은 그야말로 숨막혔다. 치열한 분위기였다. 이미 진학할 대학을 결정한 뒤였고, 성적은 담임선생님도 안정권이라고 인정했다. 더 이상 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합격하리라고 말하면서도 담임선생님은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러는 게 아니다. 네가 다른 아이들처럼 열심이지 않다는 건, 다시 말해서 다른 아이들이 쟁취해낼 기회를 너는 놓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네가 만사에 열성적이지 않은 건 네 성격 탓이기도 하고 네 환경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로 인해서 너는 나중에 큰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나의 학생이고 나는 너의 선생님이다. 네가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걸 아니까, 현재의 네가 어떻게 행동하고 성향이 어떻든지 간에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조건을 맞춰주는 게 너의 선생님으로서 내가 할 일인 거다. 그러니 가서 원서를 넣어. 그 때, 같은 반에서 성적 좋은 아이에게만 신경쓴다며 빈번히 상담하는 나와 선생님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할 성적이 된다는 걸 알고는 내게 맡긴다면서 연락이 끊긴 장 변호사님이 그나마 보호자의 전부였다. 그것을 불행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내게는 돌아가신 부모가 남겨준 재산이 있었고, 그 재산을 무사히 관리해주는 후견인도 있었고, 그 후견은인 간혹이나마 나를 들여다보며 신경 써 주었다. 아귀같이 달려드는 친척들도 막아주었다. 그러니까 불행하지는 않았다. 세심하게 신경쓰는 보호자가 없는 대신 진로문제로 악을 쓰며 싸울 필요도, 합격에 대한 압박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에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원서를 받아 S대로 갔다. 결국 해마다 찾아뵙기도 했는데... 그러나 원서를 내러 갔어도 전공까지 진지한 마음이었던 건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진지한 마음으로 전공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몇 번이나 그 순간이 되돌아온대도 똑같은 결정을 할지도 모른다. 그 때, 내가 어느 과에 지망하는 것이 합격 가능성이 높을 지를 재보고 있을 때, 나는 그 때 지윤이를 보았다. 그 때는 이름을 몰랐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면서 재어보자고 서성이고 있을 때 그 애가 눈에 띄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작고 얇은 듯한 입술을 꾹 다문 그 애의 얼굴이 절박했다. 그 절박감은 접수장에 있는 누구와도 달랐다. 접수장 안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다들 나름대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다들 저마다 치러왔고, 접수장은 그 판가름의 장소였다. 하지만 그 애는 마치 포식자에게 쫓기는 한 마리 짐승 같았다. 무표정한 낯빛으로, 그러나 보고 있는 내가 더 숨이 막히는 얼굴. 나는 그 애의 곁에 섰다. 청바지와 외투 차림의 그 애는 나와는 달리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원서를 받을 접수관의 손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애가 보고 있는 것은 아마 손이 아닐 터였다. 나는 그 애가 보고 있는 것을 영영 모를 터였다. 그 애가 원서를 책상에 얹기 직전 나는 한 걸음 비스듬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 애의 원서를 접수관이 받아 쥐었다. 지윤. 성은 접수관의 손이 가려 볼 수 없었다. 그 애는 그 자리에 서서 원서가 서류 더미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나는 그때서야 접수관을 보았다. 영문과였다. 나는 그 과에 지망했다. 그리고 봄,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는 짙은 색의 그 청바지를 샀다.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바지의 선은 지윤이 가진 옷들 중 대부분에 어울릴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면 바로- 소포를 부치도록 하자. 손에 쥐어줄 수 없으니 학교로 보내자. 코 끝이 매워오는 것을 억누르면서 나는 포장된 청바지를 받아들었다. ----------------------------- 격월간지로 업종 갈아치운 그남자 이야기, 인사드립니다. (...) ...월간지로 복귀할 수 있어야 될 텐데...(먼산) 먼여행님, 여행 무사히 다녀오세요^^ 덧. 2월 7일 오전, 국문과를 영문과로 수정합니다-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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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먼여행의 정류장, 북극분점 | 2006/02/11 14:51 | DEL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다 보니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저편에 새하얀 플라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를 집어들다가 으슬 오한이 스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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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먼여행의 정류장, 역장의 노트 | 2006/03/08 16:17 | DEL
그 남자 이야기, 10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다 보니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저편에 새하얀 플라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를 집어들다가 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