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30 13:00
| 먼여행님의 그림자의 노래 열한번째 이야기 12. 소명은 내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어 내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었다. 나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아픔을 느꼈다. 소명에게서도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침묵하며, 굳건히 나를 받아들이지 않던 지윤이 떠올랐다. 심장을 조여오듯 불안한 확신, 지윤은 내게 끝을 고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이제 두 번 다시 예전으로는, 예전 같은 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이 예감을, 나는 무시하고 의심하며 아니리라 되뇌었으나 그것은 이미 독이 퍼지듯 내 심장과 머리에 확실히 달라붙어 있었다. 소명은 내 어깨를 밀어내는 대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끈대던 아픔이 가셨다. 소명은 맑은 눈으로 단단하게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다면 괜찮은 것이다. 나는 안심하고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소명은 웃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소명은 내 양뺨에 손을 대어 바로잡았다. "나를 보고, 말해 봐."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소명의 양 손에 붙잡힌 채 소명의 매끄러운 코끝이나 가늘게 휘어 우아한 눈썹 등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소명의 흔들림없는 눈의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할말을 찾다가 간신히 말했다. "눈가에 주름이 생겼네." 소명이 대답대신 찰싹, 양 뺨을 때렸다. 아프지 않은 손길이라도 제법 얼얼했다. 한 마디도 않은 채 노려보고 있는 그녀는 매서웠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애인과......" 나는 입술을 벌렸다. 타인에게 말할 때는 되도록 단순화시켜서 말해야 쉽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단어가 입밖으로 흘러나왔을 때, 그 의미가 나를 뒤흔들었다. 깊게 생각한 적 없었던 그 의미가. 지윤이 애인이었던가. 애인이라고 불러준 적이 있었던가? 지윤이 나를 애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손끝이 떨렸다. 혼자 우는 그 아이. 언제나 절박한 표정을 하던 그 아이. 내가 일본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바로 찾아와,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눈가가 새빨갛던 그 아이. 지금도 병원에 있을까. 소독약 냄새와 여자들 특유의 몸냄새가 적막속에 가라앉아 꽃도 침침해보이는 순백색의 그 병실에서, 가느다란 선배의 숨소리만 들으며 그 아이는 그렇게 혼자 울고 있을까. 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지윤의 생각에서 벗어나 소명의 눈을 보았다. 두 눈에서 연민이 가득 흔들리고 있었다. "......헤어진 것 같아." 꺼칠하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명은 눈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이 건조하게 닿을 뿐인 키스였다. 그리고 소명은 내 손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뭔가 분주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비스킷과 치즈로 카나페를 순식간에 만든다. 오랜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소명은 술을 좋아한다. 나는 그녀를 위해 잭콕을 자주 만들었다. 어느새 잭콕 두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소명이 피식 웃었다. "말해봐." "말했잖아?" "아니지, 머리꼬리 다 자르면 무슨 생선인지 어떻게 알아?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어?" 나는 대체 무슨 일을 말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명은 한숨을 가볍게 쉬고 말했다. "마지막에 무슨 일이 있었어? 왜 헤어진 것 같다고 생각해?" 순간 말이 막혔다. 나는 대답대신 잭콕을 마셨다. 달콤하고 찌르르한 감촉이 입안을 적셨다. 지윤에게 섹스를 강요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끝내 나는 소명의 교묘하고도 능숙한 화술에 넘어갔다. 입국해서 있었던 일부터- 병원에서 있었던 일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나는 가끔 소명이 정말 놀라운 여자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줄 알 뿐더러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을 볼 줄 아는 여자다. 그녀는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는 그녀가 나를 크게 나무랄 거라고 여겼다. 알고 있었다. 지윤이- 지윤이 뿐만 아니라 나도-. 내가...... 하지만 소명은 그저 나를 볼 뿐이었다. 그녀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애인을 사랑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소명도 내게 대답을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진희 씨. 애인이 진희 씨를 사랑해?" 소명은 잭콕 잔을 든 채 일어나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진희 씨는 상대가, 그 애인이 뭘 원하는 지 알아? 얘기해 본 적 있어?" 나는 침묵했다. 소명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는 마치 내가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이 된 양, 배우의 속마음을 연기하는 배역이라도 된 양 침착한 목소리로 묻고 또 물었다.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서 제대로된 대화를 나눠본 적 있어?" 소명은 컵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내 무릎에 양 손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잭다니엘의 방향을 품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는 나를 응시했다. "진희 씨. 상대가 배려받지 못하는 건 사랑이 아냐. 적어도 사랑받는다고 느낄 수는 없어. 진희 씨, 나는 진희 씨를 사랑해. 하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진희 씨를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진희 씨는 내 사랑을 느끼지 못할 거야. 마찬가지야. 사랑한다고 백번천번을 말한대도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아." 나는 이튿날 한국으로 돌아갔다. 시차도 없어 피곤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의외로 몸이 무거웠다. 호텔에서 잔 것은 역시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차를 끌고 변호사님을 찾아갔다. 상담 중이었다. 비서 누나가 미안해하면서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30여 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면서도, 지루한 비행으로도, 찬물 샤워로도 식지 않던 열이 드디어 빠졌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대체 여기까지 찾아와 무슨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일하는 사무실에 들이닥치다니. 서너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는 헛웃음 짓고 일어섰다. 늦었다. 상담이 끝났다. 변호사님은 손님에게 나를 조카라고 인사시켰다. 고개를 숙이며 대충 인사를 치르고 나는 얄짤없이 변호사님이 배웅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변호사님은 피곤한 얼굴에 놀란 기색을 담고 나를 보았다. "아뇨, 아닙니다." "그 재일교포 아가씨 일이냐?" 나는 그만 확 인상을 썼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조사하셨습니까?" "거래하는 은행장과는 친분을 트는 게 당연하지." 여행사 항공권 내역으로 금액이 빠져나가는 걸 보고 은행에서 말한 모양이다. 여전히 이마를 찌푸린 나를 보고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구나. 그래도 국내도 아니고, 아무리 가깝대도 출국은 말하고 다녀야지.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받기가 너무 힘들어지잖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저씨가 급히 나를 붙들었따. "네가 여간한 일이 아니면 안 온다는 거 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아닙니다. 없어요." 아저씨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나는 웃었다. "아저씨." "응?" "날 사랑한 게 아니었던 거죠?" 물을 마시려던 아저씨의 동작이 멈췄다. "내 부모님은 날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나는 부루퉁한 어린애로 돌아간 나를 느꼈다. 이제 와서, 이렇게 뒤늦게, 다 커서. 하지만 더 이상은 누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묻고 싶었다. 질문이 입밖으로 나왔는데도 여전히 혀끝에서 아직 멀었다고, 하고싶은 말이 많다고 내 안에서 무언가가 날뛰었다. 아저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니다! 네가 일찍이 부모님을 잃어서, 네 아버지가 너무 바쁘긴 했어. 그래, 많이 바빴지만, 방치됐던 건 맞지만 그래도 널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왜 그래? 넌 여지껏 이렇게 올바르게 자랐잖니? 무슨 일이야?" 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생각났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는 걸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고."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던 거겠지요. 나는 사랑받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얘야, 아니다!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만, 얘야, 그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란다!" 나는 당황한 아저씨를 향해서 웃었다. "이제 와서 투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옛날 일이에요. 그랬었다는 게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 나 역시 지윤에게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 나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나와 걸었다. 창문을 열고 차를 몰면서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의, 그런 것을 혐오하지는 않았다. 속물근성이 어쩌니 하며 혐오하기 전에, 내가 사랑받는 게 아니라고 깨닫기 전에 두 분은 돌아가셨다. 더 계셨어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거였으니까. 내겐 그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나를 한 번 더 칭찬해주기를, 내가 기대를 충족하고 있다는 걸 봐주기를, 말 한 마디라도 건네주기를, 하루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기를, 어린 나는 기다렸다. 어른의 시간과 어린애의 시간은 다르다. 부모님은 아마 최대한 자주 나를 생각해냈겠지.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가끔 어머니가 이층으로 올라와 나를 껴안으면 그 화장품 냄새, 향수 냄새와 체취가- 그 체온이 아찔하게 행복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가슴 먹먹했는지를. 그것이 왜 그렇게 가슴에 사무치는지 어린 나는 몰랐다. 나는 어린 내가 겪었던 것 그대로 행동하고 있다. 나는 지윤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주차장에서 올라가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기 직전 서성이던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그 뭐라더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윤과 이어폰을 나누어 꽂고 음악을 듣던 녀석이었다. ---------------------------------------------- 대사 한 마디 치면 완전히 삼류드라마같은 절단. 문장 하고는 orzorz 읽는 사람 없다고 이렇게 대충 설렁설렁 쓰면 안됩니다 orzorz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