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14 23:56
| 그림자의 노래, 그 남자 이야기 1회 먼여행 님의 그림자의 노래, 열두번째 이야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언제였을까, 지윤이 내게 그 한 마디를 던진 것은. 그 전에도 여러 번 그런 말을 했었다. 지윤이 잔뜩 술에 취했을 때. 나는 지윤이 그렇게 많이 취할 줄 안다는 게 놀라워 그만 말릴 기회를 놓쳤다. 흰 피부에 취기가 올라 홍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때는 지윤도 나도 어렸다. 막 대학에, 20대에 들어섰던 때였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발그스레한 지윤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윤이 취기 올라 풀어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나는 지윤이 취해서 흐트러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풀어진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평소의 경계와 깊은 주의, 행동을 얽어매는 수많은 생각들이 술기운에 가닥가닥 풀어져 지윤의 눈은 보기 드물게 대담했다. 지윤이 그 동안의 내 행동을 모두 알아차린 것처럼 느꼈다. 원서를 접수하던 그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내 지윤을 주시했던 나를 모두 들켜버린 것처럼 부끄러웠다. 새벽이었다. 나는 술에 취한 지윤을 데려가고 있었다. 동기들, 선배, 그 누구도 지윤의 집을 몰랐다. 지윤에게 물어도 애매하게 웃을 뿐이었다. 예의 부드럽게, 또한 단호하게 거절을 떠올리는 지윤만의 웃음이었다. 취한 상태에서 지윤을 억지로 다그쳐 굳이 집을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밤, 더워지고 있어도 바람은 차고, 더 차가워지고 있었고, 그러나 깔렸던 어둠이 엷어지며 하늘이 은밀한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접어둡니다 나는 부축하고 있던 지윤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이마에 가져다댄 입술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지윤의 감긴 눈 위에 입을 맞추고, 달아오른 뺨을 거쳐 입술에 이르자 지윤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짧지만 농밀한 키스가 끝났을 때 재차 지윤이 목에 팔을 감으며 몸을 붙여왔다. 딱 이맘때였다. 키스의 여운에 몸이 달아올라 붉어진 내게 지윤이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동안의 나를 몰랐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아까 지윤이 다 아는 것처럼 느낀 것은 내 착각이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뜻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윤에게 마주 웃었던 일을 기억한다. 동시에 다정했던 그 말이 오랫동안 억눌린 원망과 아픔을 담게 된 그 일 또한 기억한다. 나는 오랫동안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했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나치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조절하려 노력했다. 내 감정을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이제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때, 다정하게 나를 받아들인 그 말, 애정을 품은 그 말이 정 반대의 감정을 품었을 때의 나는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저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후배가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을까. 조교가 바뀌더니 그렇게 쉽게 주소를 알려주는 건가 짜증스러웠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얼굴을 드는데 그 기척이 사뭇 날카롭다. “선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쏘아보았다. 내 집 앞에 이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불쾌했다. 더구나 이름까지 생각나버렸다. 동시에 그 광경이 다시 눈에 선히 떠올랐다. 이어폰을 나누어 음악을 듣고 있던 광경이, 그 환하던 정오, 그 환한 만큼 짙던 그림자 속에 앉아서 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 새삼 화가 치밀었던 그 날. 그건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난 그렇게 지윤이 편안하게 짓는 표정은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 앞에서 지윤이 그런 표정을 지은 일은 없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하지만.” 나는 이어지려는 박현규의 말을 잘랐다. “그래야 될 거야. 몹시 불쾌하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등을 돌리고 도어락을 열어 손가락을 얹었다. 지문이 인식되기까지 2초 가량이 흐르고, 이윽고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박현규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요!” “그래서?” “네?” 아직 앳된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렇다고 내가 들어야 하나?” 천천히 박현규의 눈에 쓰린 분노가 번졌다. “선배는 정말…… 지윤 선배도 이런 식으로 상처입혔어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후배가 내게 지윤이와의 일로 따지러 온 게 맞는 건가? 그런 건가? 무엇 때문에? 어째서? “선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도, 지윤 선배를 괴롭힐 자격 같은 건 없어요! 나영 선배도 나쁘지만, 나영 선배가 그러도록 만든 건 당신이잖아! 지윤 선배는 이제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아! 지윤 선배가 왜 그렇게 죄진 사람처럼 숨어다녀야 하고, 왜 그렇게 울어야 해요?” 지윤이가 울었다고.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인데, 당신은 왜 당당하기만 하고! 사람들은 당신이 없으니까 아쉽다고만 하고!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나영이가 지윤이에게 뭐라고 했구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박현규가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지윤이에게, 그 남들을 못견뎌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한 거다. 쉽사리 속내를 털어놓는 아이가 아닌데, 이렇게 다 알도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눈앞이 붉었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그저 아득했다. “선배한테 상처주지 말아요!” 나는 어깨를 추슬렀다. 집요하게 떠오르는 나영과 지윤을 억지로 떨쳤다. 먼저 해야할 일이 눈앞에 놓여 있다. 나는 박현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스스로의 말에 자기 자신도 놀라서 흠칫거리는 눈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분노가 남아있는 눈이었다. “너는 뭔데?” 나는 아직도 더 말하겠다고 입술을 벌리는 박현규의 말을 딱 자르면서 몰아붙였다. “너는 대체 뭐야? 네가 우리 문제를 대체 뭘 아는데?” 박현규가 이를 갈았다. “적어도 선배가 상처 입은 걸 알 정도로는 알죠.” 눈이 있으면 알겠지. 나는 웃었다. “그럼, 넌 그런 지윤이한테 뭘 해줬는데?” 나는 팔짱을 끼고 박현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잘 아는 너는 지윤이와 무슨 관계인 건데?” 박현규가 창백해진 얼굴로 가고, 나는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도쿄나 서울이나 더워지는 계절이었다. 샤워하는 도중 전화가 울렸다. 물을 떨어뜨리며 손에 든 전화기의 액정에는 나영의 이름이 깜박이고 있었다. “선배? 왜 이렇게 연락하기가 힘들어요!” 투정 섞인 목소리.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응.” “전화는 응답기가 받고, 집에는 없고, 학교에도 안 나오고, 걱정했단 말이에요.” “응.” “지금 어디?” “집이야.” “응, 그럼 나 갈래. 보고 싶어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말해놓고 붉어진 뺨으로도 오히려 더욱 꼿꼿이 드는 얼굴. 나는 빈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선배?” “아냐, 내가 갈게.” “응? 정말?” 뛰어오르는 기쁨을 억누르는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에,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할 말이 있어.” 나는 차를 몰면서 전화기 너머부터 전해져 온 그 불안이 감도는, 또한 싸늘하게 도사린 기척을 생각했다. 당시, 내가 일본에 가기 전, 지윤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동거는 과에서 화제였다. 아직까지 어째서 화제였는지는 잘 모른다. 단지 지윤이 시선을 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지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당시에도, 지금도. 술자리에서도 지윤에게는 선배들조차 과하게 대하지 않았고, 시간이 깊어 지윤이 일어나면 아무도 지윤을 붙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하기 껄끄러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리꽃 같은 아이였다. 같이 살면서 처음 공연에 함께 갔을 때 티켓을 보고 이마가 흐려졌다. 그 뒤로 나는 일부러 티켓을 보여주지 않고 데려갔다. 그래도 보고 나오는 길에 얼굴이 흐렸다.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데려가는 걸 멈추지 않았던 것은 공연을 보는 지윤의 눈빛 때문이었다. 공연의 열기에 물들어 눈빛이 열렬해지고 두 뺨에 더운 피가 돌며 환하게 피어나는 표정이, 내게는 더없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자주 같이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며 과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 같다. 자연히 우리집에 오겠다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다들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오래 있을수록 지윤이 힘들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 나영만이 개의치 않고 죽 찾아왔다. 일본행이 결정되고, 그걸 나영이 알았던 날, 그 때도 울면서도 고개를 들고 지윤이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집을 나가는 지윤의 기척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영은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원피스를 입고, 흰 머리띠에 흰 샌들을 신고 서 있었다. “차에 타겠어?” “아뇨, 우리 좀 걸어요.” 나는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선선했다. “선배. 할 말이 뭔데요?” 전투에라도 뛰쳐나갈 듯 공격적이되 방어적인 눈빛이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나영이 눈을 크게 떴다. 긴장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네게 진심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흰 원피스에 그만 자국이 생겼다. 나는 손수건을 쥐어주었지만 나영은 받기만 했을 뿐 닦지도 않았다. “너무한 것 아니에요? 선배가 언제나 내 생각대로 되어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래도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나영아.” 나는 나영의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나영은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는데. 선배는 안 좋은 말 할 때만 친절하잖아. 그 때도 그렇게……” 나영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나영이 언제를 말하려는지 안다. 그 때 나는 나영의 대담한 기질을 처음 알았다. “지윤 선배. 저 진희 선배한테 할 말이 있어요. 죄송하지만 비켜주시지 않을래요?” 나영은 고개를 바로 들어 지윤을 바라보았다. “나가자.” 나는 일어서서 나영을 끌어당겼다. 지윤이 손님인 것처럼 대하는 나영의 태도가 거슬렸다. 하지만 먼저 대답한 건 지윤이었다. “내가 나갈게. 얘기해.” 지윤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외면한 채 일어섰다. 나는 당황했다. 추호라도 자신이 방해된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냐, 내가 나갈 테니까 있어. 나영아.” 나영을 돌아보면서 말하는 그 순간이었다. 지윤이 일순 보인 눈빛에 처참한 심경이 역력히 드러나 당황한 그 때였다. 나영이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사랑하고 있어요.” 등에 닿은 나영의 이마가, 내 가슴에 두른 두 팔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집을 나가는 지윤을 놓쳤다. “……가 뭐라고 했어요?” 나는 지윤을 생각하다가 나영의 말을 듣지 못했다. 나영의 뺨이 어느새 말라 있었다. “그 때도 그랬었죠. 생각해보겠다던 선배는 다음날 내게-.” 나영은 서글프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다정하게 말했죠. 일본에 다녀와서도 변하지 않으면 그 때 생각해보겠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그저, 생각해보겠다고.” 나영은 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호흡을 견뎠다. “나, 바보 아니에요. 나도 생각 많이 했어요. 그 때, 선배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들고, 이번에는 무슨 말을 했기에, 번번이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나도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선배 계속 사랑하는 거, 정말 너무 힘든데! 왜-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 사람은!” “나영아!” “대체 이번엔 뭐라고 했어요? 내가 괴롭혔다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했다고?” “나영아!” 나는 발을 쾅 구르며 소리질렀다. 나영이 큰 눈으로 떨리는 어깨를 억누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윤일 그렇게 말하지 마.” 나영의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만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나영이 문득 웃음을 떠올렸다. “선배, 선배가, 일본으로 떠나자마자 지윤 선배는 바로 집을 옮겼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좋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항상 약해 보이는 게, 그것 모두가 그저 행세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렇지 않다. 지윤이는 그저 약할 뿐. 그렇게 표정에 나올 정도로 상처를 받고도, 모질지 못하고 약하기 때문에 내 앞에서 떠날 수 없었던 것 뿐이야. “선배.” 나영과 눈이 마주치고, 나영은 무슨 말을 할 듯 벌리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을 깜박이더니 급기야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 꼿꼿하고 바르던 나영이 고개를 내 앞에서 숙이고 있었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다는 듯 비틀거리면서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셔츠가 천천히 젖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지윤 선배가 좋아요?” 해가 기울고 있었다. 빗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날이 빨리 어두워졌다. 내가 대신 일본에 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지윤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가득한 얼굴로 날 보기만 했을 뿐. 그 얼굴을 보면서도 외면한 것은 나였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그러나 보내지 않겠다고 떠나면서 나는 내 손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놓쳤던 건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날, 나영을 돌려보내고 난 뒤 나는 돌아다니면서 지윤을 찾았다. 찾아도 찾아도 보이지 않던 지윤은 집에 돌아와보니 어둠 속에서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디 갔었냐고 묻는 내게, 그 말을 뭐라 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뱉었던 것을 지윤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내게 말한 원망이라는 걸 지윤이 알고 있을까. 나영의 울음 섞인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싼 채 나영의 목소리를 떨치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되풀이해서 그 물음, 한없는 괴로움과 체념이 담긴 그 물음을 생각하고, 내게 똑바로 물어온 나영이 똑같은 태도로 비난했을 지윤을 생각하고, 시선을 두려워하는 그 아이가 얼마나 괴로워했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다. 조교가 나를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웃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뭐가?” “그게, 사흘 동안 술 마시고 나흘째 억지로 정신차렸지만 여전히 폐인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그렇게 형편 없어?” “응.” 뜻밖의 평이라 난감해하면서 나는 조교에게 물었다. “박현규, 알아?” “아, 응.” “내 주소 가르쳐줬지?” 조교가 움찔거리면서 걸리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슨 짓이라도 했어?” “찾아왔어.” “뭐?” 나는 놀라는 그 얼굴에 바짝 다가섰다. “한번 더 정보를 흘린다면, 한번만 더 이런 사태가 생긴다면 그 땐 나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하, 하, 원진희, 미안해.” 넉살좋게 조교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농담 같아?” 그 말에 조교의 안색이 굳었다. “아니.” 나는 슬쩍 웃었다. “대신 줘야할 게 있어.” “야, 원진희.” “맨손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어?” 조교는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윤이가 무슨 과목을 듣는지,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강의실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보면서 기다렸다. 항상 일찍 와서 수강 준비를 마치던 지윤이 답지 않게 강의시작 2분 전에 도착해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재촉하듯 빠른 걸음걸이, 지나칠 정도로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태도, 얼마나 사람을 피하는지 역력해서 가슴이 쓰렸다. 그렇다면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사라질 것이다. 나는 교수의 마지막 휴식 시간이 끝날 시간을 맞춰서 강의실 앞으로 내려갔다. 나는 강의실의 뒷문 옆에서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기다렸다. 동기와 선배, 후배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다들 내게 뭐하고 있느냐고 한 마디씩 던졌다. 개중에는 나영도 있었다. 나를 지나치다가, 잠시 멈춰서서 고민하더니 다시 돌아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 같기도, 울음을 꾹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뭐해요?" "지윤이 기다려." 나영은 잠시 침묵했다. "차가운 데 앉아 있음 치질 걸려요." 나영은 농담을 던지려 했던 모양이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웃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며 생각했다. 벽 너머에 지윤이가 앉아서 강의를 듣고 있을 것이다. 바르게 앉아서, 강의에 주의를 집중하며, 이따금 드는 딴생각과 마음의 흔들림을 누르듯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필기하면서. 지윤이가. 교수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제일 먼저 지윤이가 나왔다. 나는 지윤의 손목을 낚아챘다. "지윤아." "이거 놔." 지윤이 손을 뿌리쳤다.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 "할 말이 있어." "난 없어. 놔 줘." 단정한 이마를 찡그리면서 지윤은 손을 빼려 했다. 불안해하는 시선이 일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이 몇몇은 지나가고 몇몇은 안에서 쳐다보았으며 몇몇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지윤의 찌푸린 얼굴에 가슴이 뛰었지만 놔줄 수는 없었다. "미안해." 지윤의 이리저리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가 머뭇머뭇 멎었다. 이윽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몹시 안도했다. 또한, 나는 더욱 빨라지는 심장 고동을 느꼈다. "잠깐만 시간을 내줘." 시선이 몹시 부담스러운 듯 지윤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지윤을 놓아주고 앞장세웠다. 층을 올라 지윤이 간 곳은 잘 쓰이지 않는 다용도실이었다. "할 말이 뭔데?" 지윤은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문을 닫았으나 바로 그 옆에 서 있었다. 경계가 역력한 기색에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나는 몰라보게 초췌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뺨이 우묵하게 패이고 피부도 까칠하다. 눈에 핏발도 선 걸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그렇게도 선배가 걱정스러웠을까. 순간 치미는 감정에 할 말을 잊었다. "말 안하면 갈 거야." 나는 손을 뻗어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귓불에 손가락을 감았다. 뼈만 남은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원진희." 지윤은 내 손을 거부하기 위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지윤을 살짝 끌어안았다. 지윤이 손을 들어 나를 밀어냈다. 부드럽지만 밀쳐내려고 단단히 각오한 손길이었다. "더 이상 안되겠어. 네가 아니면 안돼." 나는 목이 메어오는 걸 느끼며 낮게 말했다. 지윤의 손이 멎었다.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기다리던 내가 불안해져 지윤의 어깨를 쓸어내려볼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나영이와 사귀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어." "학교 사람들이 다 알아. 나영이도... 그렇게 말했......" "그런 적 없어." "거짓말..."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윤을 안고 있던 손을 어깨에 얹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 싫어, 예전처럼 너에게 휘둘리고... 하나도 절실하지 않으면서... 나 좋아한 적도 없으면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윤아." "이제 싫어..." "지윤아." 나는 되풀이해서 지윤의 이름만을 불렀다. 지윤은 내 품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목이 뜨거웠다. 처음에는 어째서 네가 눈에 들어왔는지 몰랐다.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같이 지내며 거리를 천천히 좁히다보니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에도, 지금도, 지윤아, 나는... 너 없이는 안되겠어." 이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아. 얼굴이 몹시 더웠다. "날 사랑해?" 지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젖은 눈동자가 빛났다. "대답 못했잖아. 날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가 아니면 안돼, 사랑해.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몇 번이라도 말할 수 있어, 사랑하고 있어." 지윤이가 울었다. 나는 지윤의 젖은 뺨을 감쌌다. 입술을 가볍게 지윤의 입술에 맞댔다. "정말... 너, 넌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지윤이가 속삭였다. 따스한 입김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뜨거운 팔이 목에 감겨왔다. 희미한 웃음기가 어린 것이, 착각인지도 몰랐다. 나는 아주 길고 긴 여정을 거쳐 간신히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점차 진해지는 키스를 맛보며 그 새벽의 대기가 다시 주위를 휘감는 기분이었다. 두려움이 가시고 있었다. 지윤의 체온을 느끼면서 나는 조교에게서 얻어낸 현진 선배의 집주소로 찾아갈 일이 없어서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몹시 두려웠었다. 지윤의 살냄새가 짙게 피어올랐다. 내 팔 안에서. 후기 -------------------------------------------------------- 13개월만에 끝난 연재. 먼여행 님께 감사드리면서 맺습니다. 원진희,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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